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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출처]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제 일화들. txt

-신동혁-


나는 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나 자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관리소 사람들은 ‘개천 14호 관리소’라 부른다. 나와 함께 있었던 관리소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태어났거나 오래전에 관리소에 들어왔기 때문에 바깥 세상의 존재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그곳에서 관리소의 규정을 지키고 살다가 생명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단지 우리의 부모와 조상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갖고 있었다.


아마 수감자들의 70% 정도는 본인들이 왜 관리소로 잡혀왔는지 이유를 잘 모를 것이다.
나의 경우 관리소 수감 대상자를 찾는 과정에 듣기론 아버지 형제 중 첫째와 둘째가 월남했다는 과거 일을 들추어내어 관리소에 수감시킨 것 같다.
관리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형제들은 사람이 아니다. 신분증을 회수 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아버지 형제들은 한 명씩 한명씩 떼어 내어 갈라놓아서 누가 어디로 갔는지,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우리 가족의 완전통제수역 수용소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첫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각종 작업 현장으로 동원되어 나가고 어르신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 

일의 강도는 성한(건강한) 사람이나 아이나 늙은이나 차이가 없다.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과제를 못한다고 하여 매를 맞으며, 

지금 이 시각에도 관리소 안에서는 일에 시달리다 지쳐서 쓰러지고 매를 맞아 피를 토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10세도 안된 아이들이 어두운 탄광 지하 갱으로 들어가 탄차를 밀고 다녀야 한다. 

이들은 이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다. 그들은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그들의 머릿속에는 올바른 의식은 사라지고 자신들은 관리소 정치범의 한 일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처지는 저기 

머나먼 아프리카 나라의 어린이들보다도 더 구차하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는 유엔이나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의 손길이 쏠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각종 약품과 의료 기구가 지원 되고 있다. 그러나 수용소의 어린 정치범들은 평생을 수용소에서 살다가 자기의 인생을 속절없이 마감해야 한다.  




* 1989년 6월경, 내가 인민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수업시작 전에 선생님이 몸수색(소지품 검사)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한 반이던 8세 정도 되는 여자아이 주머니에서 밀 이삭 5개가 나왔다. 담임 선생은 그 아이를 무릎 꿇어앉히고는 지시봉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계속해서 때렸다. 그 아이는 끝내 기절하였는데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나도 그 아이를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그 날 저녁 끝내 죽었다고 한다. 원래 몸이 허약한 아이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 여자 아이는 참 곱게 생겼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매 맞아 죽었어도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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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위원 자녀들은 우리 죄수 아이들을 지주나 종파 또는 혁명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위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갖은 행패를 부린다.1992년 3월 우리 학급 30명 정도가 역전으로 수집탄(땅바닥에 흘린 탄을 모으는 것)을 나갔다가 보위원 마을을 지나가다 20명 가량의 보위원 자녀들의 돌탕(돌팔매)을 맞은 적이 있다. 순간 길바닥은 30명 아이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우리들 중에 머리가 안 터진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아이들의 옷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학급장 홍주현과 문성심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우리가 한참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선생님이 와서는 아무 소리 없이 일을 시작하라고 야단만 쳤다. 우리는 보위원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치범인 조상들의 배에서 태어난 죄수이기에 보위원들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는 길이다. 그 후 우리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보위원 자녀들이 나타난다 싶으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곤 했으며 달아나다 붙잡혀서 매질을 당하곤 했다. 그들은 잘못하였다고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은 때리는 쪽이 지쳐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우리가 그들의 등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보위원 자녀들은 우리를 때리는 것으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건설 현장에서 누가 죽는다고 해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다. 단지 나의 목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보위원들의 지시에 따라 다시금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할 뿐이다. 1998년 7월 중순경,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내려 상류에서 큰 물이 덮쳐 수 백 명의 인부들이 쓸려 내려가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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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을 나를 때에는 맨손이 철근에 얼어붙어 고생하였다. 아파서 일을 잘하지 못하면 보위 지도원은 철근에 

혀를 내밀어 얼어붙게 하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있다가 겨우 철근과 떨어지면 혓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나는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시도하다 잡히는 바람에 14호 관리소 지하 비밀감옥으로 끌려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손과 발이 묶인 채 불고문을 당하였고,그 상처는 영원히 내몸의 일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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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형이 공개처형 된 이후,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매도 더 많이 맞고, 일도 더 많이 하게 되어 무척 힘들었다. 친구들도 나를 좋게 보지 않고,놀리기도 하고 이유 없이 때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소변이 마렵고, 대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반역질을 하다가 처형된 놈들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감옥을 나와 작업을 한 그 두 달 여 간에 나는 눈을 빤히 뜨고 15번 정도 바지에다 오줌을 싸야했다. 만약 몰래 바지를 벗고 오줌을 싸다가 누가 고발이라도 하여 들키면 나는 더한 모욕과 고초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 2004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재봉기 받침대를 등에 지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손에 힘이 빠지면서 떨어뜨려 받침대가 부서져 버렸다. 
재봉기 받침대는 매우 귀한 것이다. 작업반장은 이 사실을 알고 내 뺨을 몇 대 때리고 말았으나, 
이 일이 총작업반장에게 보고되어 보위지도원까지 알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나는 담당 보위지도원 사무실에 불려가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 첫째 마디가 잘려나가는 처벌을 받았다. 

이 모든 일이 내가 재봉틀을 떨어뜨리고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이루어졌다. 가운데 손가락은 그렇게 순식간에 잘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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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신동혁씨는 2005년 1월 2일 수용소의 전기철조망을 넘어 탈출에 성공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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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아마 나로 인하여 처형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작업반장과 총반장은 물론 그때 같이 산에 있던 사람들과 나와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가 나를 먼저 탈출시키고 전기에 붙어 돌아가신 박용철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직도 지난 관리소에서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때는 자다가도 꿈에서 이전에 죽은 친구들과 내게 일을 가르쳐주던 선배들이 나타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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